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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가 우물에 빠졌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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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치버 저
문학동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지금은 배우 김민희와의 스캔들로 더(?) 유명해진 영화 감독 홍상수의 첫 영화 제목이다. 1996년. 구효서의 『낯선 여름』을 영화화했다는데, 그 때는 몰랐는데(얼마 전까지도 몰랐었다) 이 제목이 독창적(?)이지는 않았다. <돼지가 우물에 빠졌던 날>이란 존 치버의 단편소설이 있었다. 전적으로 내 추측이지만, 홍상수는 존 치버의 단편소설의 제목을 자신의 영화에 차용했고, 원제는 다른 제목이었던 존 치버의 단편소설집은 번역되어 우리말로 나오면서 『돼지가 우물에 빠졌던 날』이 된 것은 홍상수의 영화를 의식한 게 아닌가 싶다.
아무튼 그 제목으로 나온 존 치버의 단편소설집 『돼지가 우물에 빠졌던 날』은 모두 13편의 단편을 담고 있다. 첫 소설 <아들딸>을 읽으면서는 마치 장편의 내용을 단편으로 압축해놓은 느낌을 받는다. 한 사람의 일생을 다루고 있어서다. 그래서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나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이 떠오르는데, 이 작품들은 모두 장편이거나 중편이다. 그러나 이 단편집에서 중심은 그런 장편의 이야기를 축약한 단편이 아니다.
『돼지가 우물에 빠졌던 날』의 소설들의 무대는 거의 셰이디 힐이라는 교외의 작은 마을이다. 대도시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통근 열차로 출퇴근을 할 수 있는, 이 작은 마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깊숙이 숨겨진 삶과 생각을 끄집어 내고 있는 게 이 소설집의 묘미라 할 수 있다. 등장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중산층이다. 그래서 1940, 50년대 미국 사회의 중산층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갔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의 모습이 지금과 얼마나 달라졌을까 따져보면 그다지 이질적이지 않다는 게 이 책을 생명력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셰이디 힐의 주민들은 매우 평안한 삶을 살아간다. 대부분 직업을 가지고 있으며, 겉으로 보기에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그러나 한 겹만 뒤집어 보면 이들은 모두 매우 불안한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신이 불안정한 비서를 채용한 후 정을 통한 후 바로 해고해버리거나, 해고 후 마을의 이웃집을 도둑질하거나, 스쿨버스를 함께 기다리는 이웃과 사랑하는 마음을 갖거나, 비행기 사고 후 돌아왔는데도 아무도 그 사실에 관심을 기울여주지 않거나… 그래서 가족들은 갈등을 겪는다. 하지만 결과는 거의 원래대로 돌아가고 만다. 원래의 상처를 보듬고 치료하는 과정은 없이 그냥 덮어두고 그저 살아간다. 마치 처음부터 그런 갈등은 없었다는 듯이, 있었더라도 지금의 불안정한 안온함이라도 포기할 수 없다는 듯이.
사랑하는 것 같지만 일탈하고, 일탈하지만 다시 돌아오고(돌아올 수 밖에 없고), 서로에 대한 기대는 과도하며, 그래서 고민하며 상실감을 느낀다.
바로 그게 셰이디 힐에 사는 중산층의 모습이다. 다음과 같은 표현 속에 불안한 평온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 우리들의 모습이 매우 적절하게 담겨 있다.
“그 마을은 도덕적, 경제적으로 가느다란 실에 매달린 것처럼 위태롭긴 했지만, 안온한 저녁 빛에 잠겨 있다.” (452쪽)
좋은 소설은 시대를 담는다. 좋은 소설은 시대를 건너서 어떤 진실을 이야기한다. 존 치버의 소설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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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4.26